성당은 진입로에서 약 13m 높이에 위치해 있어 가까이 갈수록 높고 웅장하게 느껴지며 고풍스러운 건물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다양한 회색과 붉은 색의 이분화 벽돌로 구성된 고딕 성당 건물은 도심부를 잠식하는 차갑고 거대한 현대 건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각미와 이국적인 분위기를 충실히 보여준다. 이 건물은 라틴어 십자선을 가진 고딕식 비행기로, 북서쪽에는 주 출입구가, 남동쪽에는 앱스가 있다. 내부에는 중앙부(나비), 측면부(아비), 통로(아비), 횡단부(아이스, 통로), 클러스터(찬슬)4, 앱(앱) 등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주 복도, 지하 성당이 있다. 건물 전면의 정문 입구의 창문과 개구부는 고딕식 스파이크로 장식되어 있고, 창문의 윗부분은 판자 추적기와 비슷하게 처리되어 있으며, 종탑이 연결되어..
교회는 1892년(고종 29) 8월에 정식으로 제사를 지냈으며, 1898년(광무 2년) 5월에야 완성된다. 건축가는 약현성당과 용산신학교 등을 설계한 신부 코스트였고, 공사에 참여한 노동자 역시 중국인이었다. 건축이 6년간 지연된 것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과 중일전쟁의 사회불안으로 벽돌공사로 일하던 중국인들 대부분이 철수한 데다 자금 부족과 벽돌 수급에 따른 것이다. 당시 용산 오가현(옛 용산성심병원 남서쪽 언덕)에서 벽돌을 공급받았고, 기형벽돌 90여종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건축가 코스트 신부가 1896년 2월 사망하는 것도 지연의 또 다른 이유였다. 코스트 신부 사후 같은 파리외방사성당 소속인 위토르 로이스 포이스넬(박도행) 신부가 감독해 완성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위돌박 신부는 19..
명동성당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으로 국내 최초로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성당이다. 이 곳은 성당의 종교적, 건축적 가치와 더불어 우리 현대사의 위기 때마다 지성과 양심의 보루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도 높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이곳은 조선시대 명례방에 속해 있었다. 명례방은 천주교 도입 이후 신자들의 종교계가 형성된 곳일 뿐만 아니라 이승훈이 세례를 한 곳이다. 또한 1830년(순조 30) 이후 선교사의 비밀선교의 중심지였으며, 1845년(헌종 11) 귀국한 김대건 신부가 활동하던 곳이다. 한국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성당이다. 이곳은 종교적, 건축적 가치뿐만 아니라 우리 현대사의 고비마다 지성과 양심의 보루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역사적 맥락..
피라미드의 신비는 왕의 묘지에서 시작된다. 도둑질을 막기 위해 피라미드가 입구를 돌로 막아 오랜 시간 내부 구조를 알 수 없게 했고, 818년 이집트 왕 알마문은 쿠푸왕의 보물을 찾다가 왕의 무덤방을 발견했다. 그러나 무덤 속의 석관은 비어 있었고, 왕의 보물이나 미라는 찾을 수 없었다. 왕의 유골은 대개 많은 부장품이 매장되어 있는데, 도둑이 주로 찾는 것은 유골이 아니라 부장품이기 때문에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 발견된 유일한 방이 외관이고, 왕의 무덤이 세워진 방은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피라미드가 무덤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설이다. 또한 우주의 에너지가 피라미드의 무게중심에 모여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의 왕과 왕비, 왕실의 무덤의 일종으로, 어원은 그리스어 피라미스(Pyramis)이며 이집트인들은 이를 메르(Mer)라고 불렀다. 현재 약 80마리가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은 카이로 서쪽 사막 주변에 흩어져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마스타바라는 무덤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2660년, 제3왕조 요셉왕 때, 절도를 막기 위해 마스타바 위에 작은 마스타바를 세워 첫 계단 모양의 피라미드를 지었다. 완전한 정삼각형의 모양은 기원전 2570년경 제4왕조 쿠푸왕의 피라미드에서 시작되었다. 기자의 피라미드가 신비한 건물로 여겨지는 이유는 거대한 크기 때문이다. 평균 2.5톤의 돌이 쌓여 있는데, 각 능선이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 크고 무거운 돌들이 어떻게 옮겨지고 쌓였는지 정..